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의 평범성 (문단 편집) === 상세:모든 이의 내면엔 거대한 악이 있다? === >Hannah Arendt: Nun, ein Missverständnis ist das Folgende: Man hat geglaubt, was banal ist, ist auch all-täglich. Nun, ich glaubte ... Ich habe es so nicht gemeint. Ich habe keineswegs gemeint: der Eichmann sitzt in uns, jeder von uns hat den Eichmann und weiß der Deibel was. Nichts dergleichen! Ich kann mir sehr gut vorstellen, dass ich mit jemandem rede, und [der] mir etwas sagt, was ich noch nie gehört habe, was keineswegs alltäglich ist. Und ich sage: "Das ist äußerst banal." Oder ich sage: "Das ist minderwertig." In diesem Sinne habe ich es gemeint. > >한나 아렌트: 자, 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banal)'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라고도 생각해왔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 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어서,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고 악마적인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그런 건 없어요!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고 어떤 것을 얘기할 때 그 사람이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무척 잘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그건 너무 평범해(banal[* 아렌트가 말한 정확한 단어는 banal 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악의 진부함(悪の陳腐さ)'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런데 책을 한글번역한 김선욱 교수는 이를 '악의 평범함'으로 번역하였다. 그 이유는 아렌트가 오해를 직접 설명하는 인터뷰가 여러 있는데, 그 내용은 '진부하다'는 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터무니없는', '평소에 들어본 적도 없는', '일상적이지 않는' 말에 대해서 banal 하다는 말을 쓴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래서 다시 용어 문제로 돌아가본다면, '터무니없고 일상적이지 않는 것'에 '진부하다', '뻔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평범하다'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긴 하나, 여기서 평범하다는 것은 '터무니없고 일상적이지 않는 것'이 평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말하는 사람의 수준이 평범하다는 뜻이다. 물론 이 번역어도 굳이 말하자면 헷갈릴만한 표현이다. 그래서 가장 적절한 표현은 (그 말과 생각의 깊이가) '단순하다', '피상적이다'는 뜻이 가장 정확하고, 아렌트도 인터뷰와 여러 편지에서 이를 계속해서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굳이 따지자면 '악의 단순성', '악의 피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banal 이라는 단어 자체에 그러한 의미가 없으므로 번역어로서는 애매해지긴 한다. 애초에 아렌트의 단어 선택에 문제가 있었던 것.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오해를 했고, 이에 아렌트가 그런 오해를 풀기 위해 수많은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라고 말해요. 아니면 "그건 저급해(minderwertig)"라고 말하거나요. 내 말은 그런 의미로 한 거예요. >---- >요아힘 페스트와의 인터뷰(1964)[* Hannah Arendt im Gespräch mit Joachim Fest, Eine Rundfunksendung aus dem Jahr 1964 [[https://www.hannaharendt.net/index.php/han/article/view/114/194|#]]]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이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 아이히만의 경우 성가신 점은 바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다는 점,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다는 점, 즉 그들은 아주 그리고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법률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판결에 대한 우리의 도덕 기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정상적인 모습은 잔혹한 일들을 모두 모아놓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인류의 적인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거나 느끼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379)], 그렇다고 모든 평범한 사람의 내면에 악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렌트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개념이 '모든 사람의 내면에 거대한 악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돼지 사료를 먹어치우는 굶주린 러시아인 포로들과 그걸 보고 러시아인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독일인 소작농의 예를 들었다. 이 이야기에서 소작농은 굶주린 사람은 누구라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소작농의 지적 수준은 그리 낮지도 않은데도 말이다. 타인의 현실적인 입장을 모르는 이러한 멍청함에는 정말로 터무니없는 게 있다. 그리고 아렌트는 이것이 바로 자신이 뜻하려던 것이라고 말했다. 즉, '아이히만의 사유'는 (나쁜 의미에서) '''단순했다.''' 그것은 1차원적이었고, 피상적이었고, 깊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단순한 생각에 그치는 곳에서 '타인의 현실적인 입장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이 발견된다. 그런데 아렌트에 의하면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일상적으로 당연한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ㅡ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므로ㅡ, 타인의 현실적인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는 '선한 마음'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히만과 수많은 독일인들은 어떻게 해서 '선한 마음'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아이히만은 자신이 쓰는 상투적이고 관용적인 '말'(the words)에 안주하므로써, '말'과 '현실' 사이의 모순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현존에 어떤 고통을 주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우스꽝스럽고도 한심한 상황 속에서 저질러진 범죄였다는 것이 아렌트의 분석이었다.[* 악이 결코 '근본적(radical)'이지 않으며 단지 극단적(extreme)이라는 점, 그것이 깊이나 어떤 악마적 차원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은, 이제 정말로 나의 의견입니다. 악은 겉보기에는 곰팡이와 같이 확산되기 때문에 정확히 전 세계를 뒤덮고 황폐화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말했듯이, 사유는 뿌리로 가기 위해 어느 정도 깊이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에 악은 "사유가 불가능(thoughtdefying)"한데, 사유가 악에 관여하는 순간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좌절됩니다. 그게 악의 "평범성"입니다. 오직 선만이 깊이를 가지며 근본적일 수 있습니다. ㅡ 아이히만 논쟁: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 (It is indeed my opinion now that evil is never "radical," that it is only extreme, and that it possesses neither depth nor any demonic dimension. It can overgrow and lay waste the whole world precisely because it spreads like a fungus on the surface. It is "thoughtdefying," as I said, because thought tries to reach some depth, to go to the roots, and the moment it concerns itself with evil, it is frustrated because there is nothing. That is its "banality." Only the good has depth and can be radical. ㅡ ''THE EICHMANN CONTROVERSY A Letter to Gershom Scholem'')]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 의도 중 하나는 악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깨뜨리고, 사람들이 리처드 3세 같은 엄청난 악인들에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사람들에게서 걷어내는 것이었어요. 브레히트에게서 이런 문장을 찾아냈어요. "거물 정치범들은 사람들 앞에, 특히 폭소 앞에 노출시켜야 한다. 그들은 거물 정치범들이 아니라 거대한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로,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히틀러가 벌인 일들이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자, 히틀러가 멍청이라는 것은 물론 모든 사람이 가진ㅡ히틀러의 정권 장악 이전에 히틀러를 반대했던 모든 사람이 가진ㅡ편견이에요. 따라서 대단히 많은 책이 히틀러를 옹호하면서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려고 애썼어요. 그래서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죠. "히틀러가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그가 벌인 일의 규모가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즉, 멍청이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란 얘기죠. 이 모든 범주의 위대함에는 마땅히 적용할 대상이 없어요. 브레히트는 말하죠. "조무래기 사기꾼이 위대한 사기꾼이 되는 걸 지배계급이 허용한다면, 그는 우리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특권적 위치에 설 자격이 없다. 즉, 그가 위대한 사기꾼이 됐다는 사실과 그가 한 일이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이 그의 위상에 덧붙지는 않는다." 그(브레히트)는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갑작스러운 말을 했어요. "비극은 인류가 겪는 고통을 희극이 그러는 것보다 덜 진지한 방식으로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이건 물론 충격적인 발언이에요. 동시에 나는 전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필요한 것은ㅡ당신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진실성을 유지하고 싶다면ㅡ그러한 상황들을 살피던 오랜 방식들을 기억해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무슨 일을 하건, 설령 그가 1000만명을 죽였더라도 그는 여전히 어릿광대다.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윤철희 옮김, 마음산책, 2016, p.190~19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